어제의 진리가 오늘의 오류가 된다면,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할까?

우리는 오랫동안 상식이라고 불리는 것들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며 살아왔다. 학교에서 배운 것, 부모님이 가르쳐 준 것, 사회가 당연하다고 말하는 것. 이것들은 수십 년, 혹은 수백 년에 걸쳐 검증된 것처럼 보였기에 우리는 그것을 ‘진리’라고 불렀다.

담배는 한때 의사들이 권장하는 기호품이었다. 20세기 초반 미국에서는 담배 광고에 의사가 등장해 “이 브랜드를 추천합니다”라고 말했다. 당시 기준으로는 완벽하게 합리적인 주장이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황당하지만, 그 시대 사람들은 그것을 전문가의 권위 있는 조언으로 받아들였다.

과거의 지식은 당대의 최선이었다. 그리고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옳은 일을 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우리가 지금 이 순간 당연하게 믿고 있는 것들 중에서, 50년 후의 사람들이 보면 고개를 저을 것들은 얼마나 될까?

지금 ‘올바른 식습관’이라고 알려진 것들, 지금 ‘효과적’이라고 믿는 교육 방식, 지금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경제 구조. 이것들이 모두 흔들리지 않는 진리일 수 있을까?

이 질문이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그건 우리가 얼마나 깊이 현재의 상식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진리는 시대의 산물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옳다’고 여겨졌던 것들이 얼마나 많이 뒤집혔는지 알 수 있다.

의학

19세기까지 서양 의학에서는 ‘혈액을 빼내면 병이 낫는다’는 사혈(瀉血) 요법이 표준 치료법이었다. 의사들은 이것이 과학적이라고 믿었고, 환자들은 의사를 신뢰했다.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이 치료를 받다가 과다출혈로 사망했다는 설이 있다. 당시 의사들은 그를 살리려 했지만, 결과적으로 잘못된 지식이 그를 죽였을 수 있다.

경제

경제학도 마찬가지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성장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낙수효과 이론이 경제 정책의 핵심이었다. 부유층이 먼저 부를 축적하면 그것이 아래로 흘러내려 사회 전체를 풍요롭게 한다는 논리였다. 각국 정부는 이를 근거로 세금을 낮추고 규제를 완화했다. 그러나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많은 연구들은 오히려 불평등이 심화되었다는 결론을 내놓고 있다. 진리처럼 보였던 이론이 시간 앞에서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교육

교육에서도 이런 현상은 반복된다. ‘반복 암기’와 ‘엄격한 규율’이 최고의 교육법으로 여겨지던 시대가 있었다. 체벌도 훈육의 일환으로 정당화되었다. 오늘날 심리학과 교육학 연구들은 이 방식이 오히려 학습 동기와 창의성을 억압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어제의 ‘올바른 교육’이 오늘의 ‘잘못된 접근’이 된 셈이다.

문제는 이것이 단순히 ‘과거 사람들이 무지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은 당시의 가장 발전된 지식을 바탕으로 행동했다. 그런데도 틀렸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도 같은 상황에 처해 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시대의 지식이 가져온 진보

그렇다고 해서 과거의 지식이 무의미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과거의 지식은 비록 불완전했지만, 현재로 나아가는 디딤돌이었다. 사혈 요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수많은 환자를 치료하면서 쌓인 경험과 데이터 덕분이었다. 낙수효과 이론의 한계를 발견한 것도, 그 이론을 실제로 적용해 보았기에 가능했다.

지식은 반드시 실패를 거쳐야 성장한다. 어떤 가설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자체가 새로운 지식의 탄생이다. 과학철학자 칼 포퍼는 이것을 ‘반증 가능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틀릴 수 있어야 비로소 진짜 지식이라는 것이다.

또한 당시 맥락에서 그 지식은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 사혈 요법이 전혀 의미 없었다면 그토록 오래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이해할 수 없었던 어떤 메커니즘 안에서, 그것은 일정 부분 기능했을 가능성이 있다. 지금의 시각으로 과거를 일방적으로 단죄하는 것은 역사의 복잡성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이다.

 

왜 우리는 현재의 진리를 절대적으로 믿는가

여기서 더 깊은 질문이 등장한다. 우리는 왜 매 시대마다 ‘지금 이것이 최종 진리’라고 믿는 실수를 반복하는가?

심리학적 관점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현재 편향확증 편향으로 설명한다. 인간은 지금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기준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그 믿음을 강화하는 정보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새로운 정보가 기존 믿음을 위협할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그 정보를 외면하거나 평가절하한다.

사회적 관점

사회적 차원에서 보면, 기존의 지식 체계는 그것을 지지하는 거대한 구조와 연결되어 있다. 의학적 통념은 병원과 제약 산업을, 경제 이론은 정책과 기득권을, 교육 방식은 제도와 관료주의를 뒷받침한다. 새로운 진실이 등장해도 이 구조들이 변화를 늦추거나 막는다. 진리의 전환은 단순히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권력의 문제이기도 하다.

철학적 관점

철학적으로는 ‘인식론적 겸손’이라는 개념이 이를 해결하는 열쇠로 제시된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이 불완전할 수 있다는 전제 위에서 사고하는 태도다. 소크라테스가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가장 위험한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모든 것을 안다고 확신하는 사람이다.

현대 사회

현대 사회는 정보의 속도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빨라졌다. 새로운 연구 결과가 쏟아지고, 어제의 상식이 오늘 뒤집히는 일이 잦아졌다. 커피는 몸에 나쁘다고 했다가 좋다고 했다가를 반복한다. 달걀은 콜레스테롤의 원흉이었다가 단백질의 보고로 재평가된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점점 더 혼란스러워지고 있다.

이 혼란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확신이 흔들릴 때, 비로소 우리는 더 깊이 생각하기 시작한다.

 

결론: 진리를 믿되, 진리에 집착하지 말 것

과거에 옳았던 것이 현재는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은, 지식에 대한 허무주의로 이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이것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동시에 요구한다. 하나는 지금 알고 있는 최선의 지식을 바탕으로 행동하는 용기이고, 다른 하나는 그 지식이 언제든 수정될 수 있다는 열린 자세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모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지식이 성장하는 방식 그 자체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무지가 아니다. 자신이 완전히 안다고 믿는 오만함이다. 어떤 시대의 전문가든, 어떤 위대한 이론이든, 시간 앞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진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무엇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그리고 그중에서 50년 후의 사람들이 고개를 저을 것들은 과연 무엇일까?

이 질문을 품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아마도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지적인 태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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